성도 그들은 누구인가!!
성도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목회자에게 가장 두려운 사람들은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들도 성도들 아닐까요?
사랑하면 서도 두려워하는 것을 “경외”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들의 경외에 대상입니다.
그런반면 성도도 목회자에게는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주 잘 사는 집의 가정교사로 들어 간 사람이 그 집의 귀한 자녀들에게
공부를 시킨다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가정교사가 귀한 도령님과 아가씨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 이지요.
성도들은 도령님과 아가씨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한 듯합니다.
대체적으로 나는 하나님의 종이며 대리자로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지도하고 인도하는 스승이라고 자처하지요.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기 자녀들 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케도릭 사고방식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일부 성도들을 어린아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어린아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도들을 보고하신 말씀이지
성도들을 보고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마:11:25)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은 너무 어른 같아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18:3)
그리고 자기는 그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착각합니다.
이런 잘못된 사고방식 때문에 목회를 그르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 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 자녀들의 종입니다.
어린 왕세자를 가르치는 학식이 매우 높은 대신은 아무리 왕세자가 어려도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만약 왕세자에게 무례한 짓을 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왕세자 때문이 아니라, 왕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부 목회자들만이 하나님의 왕세자들을 자기 자식이나,
벗이나 종처럼 상대하려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 위에 군립하고 지배하려 하며, 조심성 없이 대하고 성도들을 위해 조그마한 봉사를 하고서도 그들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고 착각하고 시도 때도 없이 가르치려 하고 충고하려 하고,
그들에게 간섭하여 상석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성도들을 인정으로 상대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인정과 사랑을 구별하라는 말입니다.
목회를 인정으로 하면 언제나 낭패를 당합니다.
목회자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중매 장이일 뿐입니다.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는 하나님의 자녀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가야 합니다.
여기서 벗어나 인정이 앞서거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를 내 사람 만들려고 하고,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 놓고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은혜 의식” 을 가지면 목회를 망칩니다.
내 설교를 듣고, 기도를 받고, 은혜를 받게 되었으니 평생 나를 잊어 버려서는 안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천만에 나는 그런 일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상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도적질을 합니다.
그렇게 큰 은혜를 받게 한 성도가 나를 떠납니다.
그러면 그 @ @이 나를 배신했다고 합니다. 아파하고 섭섭해 합니다.
그 성도가 내게 하나님의 자녀 되는 지도를 받다가 다른 교회로 갔다고 해서 하나님을 배신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목회자를 떠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내가 전도해서 장로, 권사, 집사, 되게 했더니 나를 배신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니_____ 내 기도로 병이 고침 받았는데 그 은혜를 모르다니_____ 내가 결혼식 주례를 해 주었는데______ 그렇게 새벽에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해 주었는데 등 등_____
라고 하면서 그들을 비판하고 배신당한 아픔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종의 위치를 잊고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남발합니다. 성도가 나를 떠났다고 해도 절대 배신이 아닙니다.
배신감을 느끼는 목회자는 아직 덜된 주님의 종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런 무익한 종의 의식이 철저해야 합니다. (눅17:10) 명성 교회 김 삼환 목사님은 이것을 “머슴 신학” 이라고 했습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가 갖추어진 목회자가 목회를 아주 잘합니다. 언제나 주님에 종의 마음을 잃지 않고 충성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잘한다면 내 역할은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이며, 나는 하나님께 잘했다고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바른 종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해 주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며 거기까지가 목회자의 한계입니다.
성도는 결단코 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목회자가 세상에서 가장 조심할 사람은 성도들입니다. 100명이 모이는 교회는 눈과 귀가 200개이고 입이 100개입니다. 그들에게 감시 받고 그들에게 기대되고 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이 목회자입니다. 성도들의 인격과 생활과 지식과 경험과 가정과 직장과 사업체와 모든 것들을 존중하고
아끼며 사랑해야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이시고 완전하신 분이셨지만 불안전하고 모자란 모든 사람들과 전혀 격의 없이 지내셨습니다. 소경도 난쟁이도 문둥병자도 미친 아이 기르는 아비도 주님에게 가까이 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과 친절과 은혜와 권능이 넘치시어서 사람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하시는 분이셨지만 요한이 품에 안길 수 있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죄인을 위해 죽으셨지만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그런 분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경외” 라고 합니다.
즉,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시지만 두려운 분이십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아주 가까운 사람이지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딱 한 가지가 갖추어져야 만들어집니다.
주님 같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되고 거룩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빠 목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친구 목회자도, 애인 같은 목회자도,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품위와 인격과 사랑과 은혜를 가진 목회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성도가 경외심을 가지고 대할 수 없는 목회자는 반드시 성도들에게 실망감을 주게 됩니다.
이런 관계를 가지기 위해 성도들과 세속적인 오락을 즐겨서는 안 되며
취미를 즐겨서도 안 될 것입니다. 목회자가 말을 적게 하고 가정을 공개하지 않고 속사정을 상세히 알리지 않으면 신비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솔직한 것이 정직한 줄 착각해서 모든 것을 다 공개하면 __ 옛날 지은 죄, 출신, 죄에 대한 공개적인 고백 돈 문제 아쉬운 이야기 자식 자랑__ 자기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자기들 보다 더 못하다고 생각되면 경외심을 잃게 되고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믿음의 덕을 위해 숨길 것을 숨기고 감출 것을 감추어야 합니다. 말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며 숨기는 것도 잘못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 쓰니라”(롬14:19)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새우도록 할 찌니라“(롬15:2)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같은 목회자를 찾고 있습니다. 자기(성도)들 판단에 목회자가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생각되면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무척 많이 노력하는 흔적만 보이기만 해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떠나더라도 다시 돌아 올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는 목회자를 통해서 당신을 나타내려 하시고, 세상 사람들에게 성도들을 통해 당신을 나타내시려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기만 하면
아니 닮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나타내기만 하여도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표본이요, 경외의 대상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언제나 공동체와 세상가운데 본이 되고 모범이 되는 삶과 신앙생활을 해야만 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