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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당연하다 듯이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 데 그 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이 질문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아흔 아홉의 양들을
산 위에 놓아두다니, 이건 중요한 판단의 오류 일 것입니다.
분명히 그 한 마리의 양은 문제가 있는 양이었습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떠나지 않았는가!
다른 양들은 모두 목자를 따라 잘 왔는데 왜 이 양만 없어졌다는 말인가!
분명 그 양은 부주의했든지 자기의 욕심을 따라 멋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귀책사유는 그 양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죄를 많은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야수가 우글거리는 산 속에 목자를 잘 따라 간 아흔 아홉의 선량한 양들은 내버려두다니 이거야 말로 분명한
판단착오가 아니냐는 것이지요,  소수를 위해 다수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양이 목자를 쫓아다녀아지 어떻게 목자가 양을 찾아다닌단 말인가?
품격으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목자와 양은 비교되지 않지요. 목자는 양보다 강하고 지혜롭다. 목자는 양을
다스리고 지배합니다. 당연히 목자는 양보다 존귀합니다. 그렇다면 양이 목자를 위해 희생해야지 어떻게 목자가
양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단 말인가? 인류역사상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위해
희생하는 사례가 있었던가?
더 큰 문제는 앞으로의 일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목자는 그 한 마리의 양을 구조하기 위하여
찾아 나서야 할 것이고 다른 양들은 또 다시 위험에 빠질 것이니까요. 그리고 길을 잃으면 또 목자가 찾아 올 테니
앞으로 양들은 그렇게 열심히 목자를 따라 다닐 필요도 없어졌다.  이러한 사태를 어떻게 막아야 할까요?
혼이 나야 할 녀석은 혼나야 한다. 그래야 다른 놈들도 정신을 차려서 길을 잃는 일은 다시 벌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 것은 일종의 풍자다. 이 시대의 생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여야하고, 높은 자를 위해 낮은 자가 헌신하며, 강한 자를 위해 약한 자가 섬겨야 하는 세계!
바로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들은 오늘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그런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주장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그가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그 목자는 이렇게 자질구레한 생각으로 앞뒤를 재고 있을 시간이 없었지요. 그의 귓전에는 잃어버린 그 양 한 마리의
울부짖음만이 메아리치고 있을 뿐이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을 네 가지의 원칙을 가지고 계십니다.

"약자를 위한 강자"
그 첫째는 약자를 위한 강자입니다. 강한 목자는 약한 양을 위해찾아 나선다. 하나님은 항상 약자의 편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이나 바벨론처럼 강하고 견고한 민족보다 노예로 힘없이 살아가는 히브리 민족을 선택하셨고
힘센 에서보다 여린 야곱을 보호하셨으며 그 시대의 선생이나 권력자를 찾지 않고 어부와 병자, 그리고
죄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는 바울서신의 교훈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교훈이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은 매우 특별한 교훈인 것 같지만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  성장한 자녀가 노쇠한 부모를 돌보는 것, 건강한 식구들이 가족 중 병자를 돌보는것,
장애가 없는 친구가 장애우를 돌보는 것 등은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를 섬겨야 하고, 약한 회사는
강한 회사에 삼켜지고 있지 않은가? 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난한 자의 권리가 무시되고 일반사람들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 장애인은 소외되는 현실이다. 양육강식의 생존의 법칙이 냉엄한 현실로 다가온다. 이 시대에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하시고 계십니다.

"낮은 자를 위한 높은 자"
두 번째의 원칙은 낮은 자를 위한 높은 자이다. 높으신 목자는 낮고 천한 양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기독교가 모든 종교 위에 뛰어난 종교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을 향해서 내려오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낮은 곳에 처한 인생을 위해 내려오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전 인류에게 희망과 빛을
던져 준 엄청난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더 높은 사람이냐? 높은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그러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기까지 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은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법칙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긴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기 위하여 날마다 낮은 곳을 찾아 다녀야 한다. 대통령이 백성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되고, 사장이
사원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교수는 학생 위에 군림해서 안 되고, 목회자는 교인 위에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혹시 높은 곳에 있다면 그것은 낮은 자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지요.

"죄인을 위한 의인"
세 번째 원칙은 죄인을 위한 의인의 헌신일 것이다.죄 지은 양을 위해 죄 없는 양들이 버려졌다. 십자가는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한 최고 최상의 모델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죄의 용서 없이 불가능하다. 죄가 크면
클수록 용서의 크기도 커가고 동시에 사랑의 깊이도 더 깊어진다. 따라서 세상에 용서 못할 죄란 없다.
사랑의 깊이가 무궁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까발리고 과장하고 매장하고 추방하고 있다. 죄인을  철저하게 공격함으로써 나의 의로움이 드러나고 추상같이 벌함으로써
나는 점점 더 정의로워 진다. 그러나 성경은 "온유한  심정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고(그 죄의) 짐을 서로 함께 지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죄인을 위한 의인의 노력이야말로 정말 가상하기만 하다. 죄는 죄인이 저질렀는데 고통은 의인이 당한다. 십자가가 아름답다면
그래서 위대하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소수를 위한 다수"
네 번째 원칙은 소수를 위한 다수의 헌신이다. 여기서 소수란 고통받는 소수를 말한다.한 마리 양의 절박함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의 안전보다 더 중요하다.그러므로 목자는 한 마리 양을 위해 위기에서 구하기위해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의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소수는 항상 다수를 위해 희생되도록 요구받았다. 다수의 의견을 위해서 소수의 의견은 묵살 당하고, 다수의 안녕을 위해서
소수의 고통은 강요되었다. 장애 없는 다수 학생들의 편안한 수업을 위해 장애가 있는 소수학생들은 특수학교로 내어 쫓기고 다수
서민들의 도서관을 위해 소수 판자촌의 사람들이 집을 잃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노인들,정신지체자들,부모 없는 아동들은 멀리
멀리 격리되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서 다수인 우리는 평안을 즐기고 있는 것이 현실일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평안을 역겨워하신다. 그런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하여 여덟 명의 병사가 목숨을 걸었듯이
최후의 한 사람이라도 희생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가,아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줄 수 있다면 그 공동체야 말로 안전한 공동체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새로운 공동체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너를 위한 나"
결국 이 모든 원칙들을 요약한다면 그것은 '너를 위한 나의 헌신' 이 될 것이다.'나를 위해 너의 헌신'을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너를 위한 나의 헌신'을 요구 하실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자신을 위한 최고의 일은 빨리 주님의 나라로 가는 것이다.
거기엔 우리들의 소원하는 모든 것이 다 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그것은 안전하게 보전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세상에 사는 이유가 더 이상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삶을 100% 바쳐 너를 위해 살 뿐이다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 가장 이상적인 길은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에게 그 이상(理想)이 있기에
그는 우리에게 생명이고 진리다.그 밖에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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