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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오전 11시 즈음해서 교회 근처의 풍경은 재미있다. 찬송가와 성서를 가슴에 안은 사람들이, 또는 그것이 담긴 가방을 든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풍경이다. 미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독일의 경우에는 교회 안에 성서와 찬송가가 비치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성서와 찬송가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어쨌든지 우리가 성서를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일단 좋은 전통이다. 개인 소유의 성서를 들고 교회에 간다는 것만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성서를 읽고 성서공부에 참석하고, 심지어는 성서의 내용을 받아쓰는 열성파도 있는 실정이니까 세계 어느 나라 기독교인들도 우리의 열정을 따라올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성서읽기가 열정적이라는 점은 좋지만 그 성서에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소위 '큐티' 식 성서읽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자기 삶에서 제시되는 모든 문제와 질문의 답을 성서 안에서 찾으려고 한다. 기독교 신자가 성서에서 삶의 해결책을 찾으려는 태도는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그것이 과도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성서를 흡사 은행에서 필요에 따라서 돈을 빼다 쓰듯이 도구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어린아이들은 매사를 어머니에게 물어보고 하지만 어느 정도 크면 어머니의 생각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게 자연스럽다. 만약 대학생이 된 딸이 자기 전에 이를 닦아야 할지 묻는다면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보다는 걱정만 끼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현대인은 성숙했으니까 성서를 읽지 않아도 된다거나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현대인이 아무리 지성적으로 성숙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여러 면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할 존재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심리적으로도 불완전하고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인식론적 한계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마보이'처럼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해야 할 문제까지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는 듯한 성서읽기는 결코 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5월 첫째 주나 둘째 주가 되면 한국의 모든 교회가 '어버이 주일'을 지킨다. 이런 절기 때마다 목사들은 효도를 주제로 설교한다. 효도, 좋은 말이다. 효도하라는데 시비를 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규범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결코 설교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히 두 가지이다.


첫째, 설교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처럼 윤리적 실천을 다루는 게 아니라 그런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 자체를 해명하는 것이다. 둘째, 설교가 기독교 윤리를 전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결코 일반론에 떨어지면 안 된다. 효도 자체가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핵심이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너무도 뻔한 설교를 듣고 은혜 받을 사람은 없다. 평소 이런 부분에서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양심의 가책을 받을지 모르지만 대다수 상식적이고 성숙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미 이런 갈등을 해결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런 감동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시어머니의 잔소리 같은 설교와 그런 수준의 신앙생활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서를 소극적으로 읽어야 한다. 소극적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성서 자체가 우리의 삶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성서읽기를 게을리 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열정을 갖고 성서를 읽기는 하되 성서의 핵심을 포착하라는 말이다.


성서는 물론 인간의 결단과 용기, 더 나아가서 세부적인 행동 지침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요소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다. 성서의 핵심은 그런 인간의 반응이 나오게 된 근원인 하나님에게 있다. 우리의 성서읽기, 또는 설교의 가장 결정적인 오류는 성서에 부수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인간 반응에 사로잡혀서 그것이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일 하나님을 믿으라고 외친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자기의 신앙을 강조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신앙을 강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늘 우리의 예상을 깨고 이 역사에 개입하는 거룩한 힘 앞에서 우리의 신앙적 행위는 거의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소극적인 성서읽기야말로 적극적인 성서읽기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서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자신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축소시키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만 관심을 둠으로써 성령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가 없기는 바란다. 우리의 소극적 성서읽기가 이 세계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일절 접어두고 영적인 것에만 집중하라는 말은 아니다. 영적인 것은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계와 역사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 그 두 세계를 더불어서 생각해야만 한다. 여기서 소극적이라는 말은 자신의 모든 필요를 성서에서 찾아서 적용시키려는 욕망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성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고유한 세계를 열어줄 것이며, 아울러 우리에게 참된 영적 체험이 가능할 것이다.


정용섭 / 샘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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