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당연히 ‘주일 예배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곧 예배드리러 다니는 것과 동일시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다만 들은풍월뿐이고, 실제로는 예배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놓치고 있다. 예배가 청중들의 종교적 만족감이나 볼거리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 근본적인 문제는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각종 행사의 과부하에 걸려 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보다는 교회의 여러 행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오늘 한국교회의 개혁은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 주일 예배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게 시급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게 무슨 말인지 세 단어의 개념을 따라가면서 살펴보자.
주일
원래 예배는 주일인 일요일에 드리는 주일공동예배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의 경우로 본다면 안식일인 토요일이다. 물론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들과 똑같이 안식일을 지키다가 로마 문화권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지키기 시작했다. 안식교회는 지금도 토요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지킨다.
안식일로 지키는가, 주일을 지키는가 하는 것이 여기서 관건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안식일 개념과 주일 개념이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로 어우러져서 이뤄낸 그것의 새로운 의미를 아는 것이다. 안식일은 창조신앙과 출애굽신앙에 근거한 ‘쉼’을 말하며,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 신앙에 근거한 ‘참 생명’을 말한다. 이 양자가 서로 다른 역사적 전통이 있긴 하지만 다른 게 아니라 하나이다. 쉼은 인간의 모든 억압적 삶의 질서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며, 참 생명은 잠정적이고 제한적인, 그리고 죄와 죽음으로 얼룩진 이 세상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생명의 잔치를 벌인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명의 잔치를 벌이신 하나님의 초청에 응한다는 것이다. 잔치에 와서도 돈을 벌 생각을 하거나 일 할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 날 우리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해방과 자유를 경험하며, 그것을 통해서 생명을 경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은 바로 복된 소식, 즉 복음이다.
오늘날 성수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주일이 오히려 억압과 속박의 날로 자리를 잡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교회에 열정을 갖고 있는 신자들은 주일 하루 종일 많은 일을 요구받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스트레스도 제법 받는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각종 모임과 사건에 휘말린다. 쉼이 없다. 그렇게 종일 시달려도 그게 은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어머니가 여러 자식들을 위해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한 시도 쉬지 않으면서 일을 해도 행복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 번이지, 평생을 그렇게 산다면 결코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교회 공동체는 가족과는 다르다. 어떤 신자에게 주일이 부담으로 다가온다면 그건 분명히 해방과 자유과 생명을 통해서 참된 쉼을 경험해야 할 주일을 바르게 지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종교적인 ‘쉼’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개는 자신이 그렇게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이건 임상 치료가 필요한 종교적 마조히즘 현상에 가깝다.
예배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그냥 모여서 밥 먹고, 수다 떨고, 친교 나누는 것으로 충분히 쉴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예배인가? 안식, 쉼, 자유, 해방, 생명 등등, 이런 것과 예배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지 못하는가? 우리의 평소 삶 자체가 예배로 드려지는 게 바람직한 게 아닌가? 옳은 말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고, 불행한 일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섭섭해 하시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주일에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가장 종교적 의미가 깊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해방과 자유과 생명을 종교적 상징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 예배이다. 그 내적인 원리는 계시와 응답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계시하고, 인간은 그것을 찬양한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우주 역사가 재현되는 축소판과 같다. 창조와 종말이 계시되고, 우리는 거기서 생명의 진수를 경험한다. 전체 인류 역사와 우주 역사를 종교적 상징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예배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인 계시와 응답을 통한 우주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이를 어찌 마다하거나 소홀할 수 있으랴?
이런 점에서 예배는 예전적이어야 한다. 자유롭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전승되어온 예전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다. 예전은 우리 개신교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라거나 너무 형식적이어서 성령의 감동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독교 영성을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가 예전에 따라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차원에서 중요한다. 첫째, 예전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계시와 응답이라는 신학적 근거에서 볼 때 가장 모범적인 예배가 갖추어야 할 틀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합창단이 노래를 부를 때 기분이 좋다고 해서 악보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부를 수 없는 것과 같다. 합창단원은 오히려 자기감정을 억제하고 악보에 충실함으로써 원래 작곡자가 경험했던 그 음악의 세계를 바르게 재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전예배는 이처럼 개인들의 종교적 열정보다는 2천년 기독교 역사의 영성에 의존하는 예배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예배가 하나의 방식으로만 드려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둘째, 예전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현재의 신앙적 실존에 떨어지지 않고 2천년의 기독교의 역사, 그리고 이후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사도신경을 함께 읽는다는 것은 이 신앙고백에 참여했던 지난 역사의 모든 기독교인들과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공동체
예배를 집에서 혼자 드려도 큰 문제가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 문제는 여기서 길게 말하지 않겠다. 혼자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틴 루터의 가르침처럼 우리는 모두 제사장들이기에 얼마든지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더불어 존재하기 때문에 예배도 더불어서 드릴 때 바른 예배가 될 수 있다. 만약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면 어떻게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어떻게 말씀을 전달받을 수 있겠는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예배는 고도의 영적 묵상이나 기도와는 다르다. 예배는 더불어서 궁극적인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의 계시를 듣고 거기에 공동으로 응답하는 사건이다. 이런 말이 너무 원론적이어서 실질적으로 들리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공동의 예배에 실제로 참여한 분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 말을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예배에서 더불어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말씀을 읽고, 그 설명을 전달받는다. 더불어서 예배드리는 그 공간 안에 소리, 글자, 물질, 색깔, 느낌 등등이 살아 있다.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놀라운 영적 경험이다. 이런 것을 혼자서는 경험할 수 없다. 하나의 공간에서 ‘너’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와 생명구원과 완성의 소리를 듣고 찬양한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 경험이다.
교회의 본질은 바로 이런 ‘주일 예배 공동체’에 놓여 있다. 그 이외의 일들은 오직 이 한 가지 사실을 위해서만 요청된다. 이런 기독교 영성의 중심을 모르기에 우리는 그 이외의 것들을 찾느라 우리의 삶을 소진하고 있는 게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제라도 물을 찾는 목마른 사람처럼 우리 모두 주일예배에 우리의 영성을 집중시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