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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사람] 이주노동자에게 인술 펴는 이승규 원장

            ▲ 연세미소의원을 찾아온 단골 노인 환자를 세심히 진찰하는 이승규 원장


어르신! 잘 지내셨어요!"

"세상 참 시끄러운데 하시는 일은 괜찮으시고요!"

"아이고 할머니, 염려마세요.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게요!"

환자들이 진료실에 들어서자 안부부터 묻고는 성심성의를 다한다. 만면에는 환한 웃음이 참 살갑다. 차트에 진료기록뿐 아니라 환자 집안의 대소사를 기입해 안부를 챙긴다. 예의바른 아랫사람이 어른 공경하듯 깍듯하다. 하얀 가운 대신 하얀 색 줄무늬 와이셔츠를 입은 키 큰(1m80㎝ 가량) 이 사람이 의사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목에 건 청진기다.

시골 사랑방 같은 '연세미소의원'은 시골 읍내 차부 어디쯤에 있어야 어울리는데 그게 아니다. 목동 옆 동네인 서울 강서구 가양1동에 위치해 있다. 진료실 벽면엔 '인술제중'(仁術濟衆)이란 서예 표구가 걸려 있다. 고풍스러운 이 작품은 시골 학교 교장을 지낸 장인어른이 써주었다.

질병에 시달린 임금 세조(世朝)는 자신이 쓴 팔의론(八醫論)에서 음식 조절로 병을 고치는 식의(食醫), 약을 잘 쓰는 약의(藥醫) 등 여덟 가지 의사 가운데 환자 마음을 편하게 하여 병을 낫게 하는 심의(心醫)를 가장 훌륭한 의사로 꼽았다. 이 키 큰 의사는 어떤 의사에 해당될까.

이 의사는 환자들의 지출을 요하는 비보험 치료를 사양하니 돈벌이가 시원치 않다. 몸보다 마음을 낫게 하는 탓에 독거노인 등 소외계층이 자주 찾는다. 한 노인 환자는 아예 의원 근처로 집을 옮겼고, 어떤 환자는 정성을 다해 치료해준 게 고마워서 케이크를 사들고 왔다. 심지어 노인 환자가 사망하면 그의 자식들이 '선생님이 덕분에 치료 잘 받고 편히 떠나셨다'고 부고를 알린다.

이주노동자 눈물 닦아주는 자원봉사 심의(心醫)

   
 
  ▲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에서 이주노동자를 진료하고 있는 이승규 원장  

이승규(45) 원장은 일요일이 되면 이주노동자들을 무료로 돌보는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자원봉사 의사로 참여해 진료 전쟁을 치른다. 어제(19일)는 60대 초반의 재중동포 여성 환자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곤욕을 치렀다. 밀어 닥치는 환자를 진료하랴, 자원봉사를 요소 요소에 배치하랴, 시급을 다투는 위급한 환자를 협력병원(고려대 구로병원)으로 후송 조치하랴….

오후 6시 무렵 진료 전쟁이 끝났다. 피곤에 지칠 법도 한데 만면에는 여전히 환한 웃음이다. 자원봉사 의사 가운데 최고참인 그는 의사, 간호사, 학생 등 자원봉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인근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일요일 꼬박 하루를 이주노동자와 자원봉사를 위해 헌신한 것이다.

참고로 그의 평일 진료는 월수금 오후 7시, 화목 오후 9시, 토요일은 오후 5시까지이다. 주5일 40시간 근무제가 정착했지만 그는 주6일 근무에 56시간의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는 개업의다. 그의 의원에서 만났을 때 그는 몹시 지쳐 있었다.

그에게 일요일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휴식을 취해야 할 귀중한 하루이다. 가족을 위해서도 그렇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건강과 가족의 행복을 반납한 것이다. 한두 달 정도 봉사했다면 그것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자그만지 9년째 이어오고 있다. 이 정도면 봉사가 아니라 사명 또는 신념이다. 어떤 힘이 그를 인술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일까?

감기가 폐렴으로, 결국 폐렴이 악화돼 숨지는 등 치료 기회가 없어 사망하는 등 의료사각지대에 처한 이주노동자들의 절박한 현실을 알게 된 그는 2001년 5월부터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이어 연세대 가정의학과 선후배를 중심으로 '평화사랑나눔 의료봉사단'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지난 9년 동안 233회의 진료를 통해 22064명의 이주노동자들을 보살폈다.

세조의 팔의론에 또 하나의 의사를 더한다면 자원봉사 의사다. 내가 볼 때 가장 훌륭한 의사는 생명의 곤경에 처한 환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휴일조차 반납한 '자원봉사 심의(心醫)'이다.

 

 

 

 

▲ 자원봉사 의사들은 병의원이 쉬는 일요일이면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에서 이주노동자를 돌보는 데 밀어닥치는 환자들로 전쟁을 치르다시피 한다.

 

좋은 의사로 키운 힘은 구둣방 아버지

   
 
  ▲ 이승규 원장.  

의사라는 직업과 헌칠한 모습으로 볼 때 '부잣집 아들'이라고 짐작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술잔을 기울이던 그는 부친이 시골 구둣방 가게 주인이라고 말했다. 그의 집안을 거론하는 것은 흉보기 위함이 아니다. 그가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의사가 되지 아니하고, 어려운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의사가 되게 한 원천은 아버지의 가난과 자식을 향한 헌신이라는 것이다.

그의 부친 이종선(75)씨는 전남 광양 읍내에서 자그마한 구둣방 가게 주인이었다. 연필 값도, 공책 값도 없는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의 부친은 학교 문턱(초등학교 1학년)을 딛다 만 어른이다. 도회지에 나가 양화기술을 배워온 그의 부친은 읍내에 '제일양화점'이란 구둣가게를 차려 40년 넘게 운영하면서 3남1여를 모두 대학공부까지 시켰다. 그는 장남이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허리 굽도록 구두를 만들던 제화공 아버지! 그의 부친은 가족 생계와 자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술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온종일 일해서 만든 수제화는 5~6켤레, 밥 먹고 잠잘 때 외에는 쉴 틈 없이 일한 아버지의 손은 가죽처럼 굳었다.

"저는 가난하지 않았어요. 다들 고무신 신었지만 저는 여섯 살 적부터 구두 신었던 부잣집 아들이었어요!"

그는 이렇게 애써 말했지만 가난했던 것은 기정사실로 보인다. 가난하고 못 배운 아버지는 자식을 남보란 듯이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허리가 휘도록 일했지만 가난을 떨칠 순 없었던 아버지는 자식 넷 학비 대기가 너무 벅찼다. 장남인 그가 교사 또는 면서기가 되기를 원했다. 자식 앞날이 그 정도만 펴도 세상 사는데 지장 없을 뿐 아니라 읍내에서 큰소리 칠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셋방살이 하던 그의 모친은 장남에 이어 생긴 아이 둘을 지워야 했는데 그게 고질병인 된 것이다. 집주인의 구박과 성화에 시달리던 셋방살이 모친은 자식을 연이어 낳아 키울 형편이 아니었다. 산후 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어머니의 병은 그렇게 시작됐다. 약도 못쓰고 시들시들 병들어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내가 어머니를 고쳐드려야 한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의대 진학을 반대했다. 서울 유학도 버거운데 거기다 등록금 비싼 사립대학 의대, 거기다 10년은 족히 학비를 대야 하는 현실이 막막했을 것이다.

소외된 이웃 섬기는 의사로 살자!

   
 
 

▲ 교장 출신인 장인어른이 써준 서예작품 '인술제중', 이승규 원장은 그 뜻대로 살려고 애쓴다.

 

"순천고(32회) 동창으로 같은 대학(연세대)에 진학한 오연호(오마이뉴스 대표)와 서동용(변호사)이는 학생운동에 적극 나서면서 수배 당하고 감옥까지 가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아버지를 생각하면 도저히 (학생운동) 전면에 나설 수가 없었어요."

의예과 과대표였던 그는 오래도록 방황했던 것 같다.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시대와 청춘이 유린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어렵고 힘겨웠던 12년의 의대생활을 거쳐 가정의학과(17기)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그는 불의한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 대신 사랑의 짐을 지기로 했다. 이주노동자 등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의사로 평생 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일요일이면 피곤을 마다하지 않고 이주노동자들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자식 넷 모두 대학까지 가르친 구둣방 주인어른은 광양과 서울을 오가며 편히 지내신다.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으시는 어머니는 자식 넷의 행복과 건강을 빌면서 내외간 오붓한 정을 나누신다. 그의 부친은 최근 의사아들 덕을 톡톡히 봤다. 세 달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는데, 매우 빠른 조치와 응급수술로 생명을 건진 것이다. '의사아들 둔 보람이 있다'며 웃으신 위대한 구둣방 주인어른은 자식농사 잘 마치고 노년의 휴식을 취하고 있다.

또 하나 그의 일가족에게서 부러운 것은 '일심동체'이다. 12년 열애 끝에 결혼한 초등학교 동창생 아내(이혜순)와 본과 1학년이던 스물아홉에 결혼한 그는 아들(중1)과 딸(초등 3년)을 두었는데 부인이 아주 미인이다. 무엇보다 그 못지않은 마음 씀씀이가 있는데 그것은 남편의 자원봉사를 도울 뿐 아니라 아들딸 등 온 가족이 자원봉사에 나서도록 협조한다. 역시 아내감은 고향 색시가 최고다.

그럼에도 가족은 그에게 불만이 있다. 때로는 가족을 우선으로 삼기 원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보다는 이웃을 더 챙기니 그럴만하다. 가족에겐 미안할 뿐인 그는 '빵점 가장'이라며 한숨 쉰다. 그와 소주를 켜면서 정담을 나누다 헤어지면서 '의사가 타고 다니는 차 치고는 좀 그렇다!'는 말을 건네자, 10년 된 낡은 소나타를 타고 다니는 구둣방 집 의사아들 하는 말이 이렇다.

"마누라와 신발, 차는 다 닳아질 때까지는 절대 안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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