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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사순절 유치부 예배


<뉴스 앤 조이>에서 펌


 - 주 위한 고난·손해보다 영광·번영에 집착하는 세대


지난주일 아침 예배드리러 교회당으로 가던 때 일입니다. 도로에 차가 별로 없는 한적한 주일 오전이지만, 시골에 사는 까닭에 교회당까지 꽤 먼 거리를 가야 합니다. 저희 가족은 종종 찬양 씨디를 들으면서 그 길을 가곤합니다.


그날도 제 아들 녀석은 요절을 외우고 저는 찬양 씨디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 멜로디를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들려온 찬양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었는데, 저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해 자주 부르는 찬양인데 최근 들어 예배나 집회시간 등 공적인 자리에서 불러본 기억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인가 싶어 아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 최근 이 찬양 어디에서 불러보거나 들은 적 있어?” 아내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어릴 적에 많이 불렀는데 언제부턴가 예배 시간이나 모임에서 잘 안 불렀던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왜 그럴까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곧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으로는 찬송가의 가사 때문이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찬송 가사의 요지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란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예수 믿는 것이 곧 노예 신분으로의 전락과 모든 사회적 물질적 권리를 포기하는 것, 바위틈과 땅 속에서 벌레 같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바로 초대 교회와 고대 교회 때 일입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이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으로 살았던,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주를 위해 능욕 받고 고난당함을 당연하게 여겼던, 아니 영광스러운 훈장처럼 여겼던 분들이었고, 그런 믿음을 소유한 분들이었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따진다면 그런 믿음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예수 믿으면 병 낫고 부자 되고 행복하며 자손이 평안하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르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과연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그런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이유 때문입니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해 또 그분의 성품과 계획에 대해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영광과 거룩한 이름을 선포하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것은 천지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들이고 드러내고 선포해야 할 인간이 범죄에 이르러 영원한 사망 아래 놓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을 통해 동일한 목적을 이루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이름을 받고 드러내는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부차적’으로 천국을 소유함과 자녀 됨의 은혜를 우리가 받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구원받고 은혜 받은 자로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인해 존재하며,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를 가까이 하며 동행하는 삶속에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부자 되고 명예를 얻고 성공하는 일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씀의 가르침 앞에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겸손히 무릎 꿇는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치 ‘가시밭의 백합화가 가시에 찔릴 때 진한 향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혹자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이 없는 줄 아느냐, 하나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어야 한다, 신앙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낙관주의다, 너 신앙이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분들에게 있어 예수 믿는 것은 능력이요, 치유고, 성공이며 번영인 것입니다. 사회의 음지가 아니라 양지를 지향하며 높은 자리에 올라 세상을 굽어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 그렇게 하실 수도 있고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그릇된 기복주의 경계해야


하지만 성경은 그릇된 기복주의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 나타나는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생을 떠돌아다니며 살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을 때 장사 지낼 한 평의 땅도 없어 주민들에게 돈을 주고 사야만 했습니다. 야곱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증언했고, 노아도 홍수 전후를 고생하며 보내야 했습니다. 그토록 존경받는 다윗도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쫓겨 다니다 왕위에 올랐고, 왕좌에 오른 후에도 자식에게 몹쓸 일들을 당하며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는 가운데 죽음을 맞았습니다. 아니, 다 제쳐두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땠습니까. 부귀영화와 향락과 쾌락이 있는 삶이었습니까. 그러면 바울 사도는 어땠습니까. 베드로는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인해 고난과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공격과 그리스도 없는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고 박해 받는 삶,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내하며 어떤 환경 속에서도 견뎌내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를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하늘나라의 ‘보상’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성경 이곳저곳에서 끊임없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으면 평안하고 잘되며 각종 복을 누리게 되리라’고 믿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근거한 확신입니까. 참말 궁금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이 아닌데도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인 탓이겠지만,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고난과 시련이 있음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주님은 천국의 보상을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라는 찬송을 많이 불러야 합니다. 예수 믿게 된 것 자체를, 주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에서 사랑받는 자녀로 선택해 주시고 삼아주신 것을 감사하고 기뻐해야지, 다른 것을 ‘더’ 관심하고 추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변에서 이 찬송을 많이 듣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한국교회의 위기를 알려주는 ‘경고음’이라 할 것입니다. 말씀에서 떠난 그릇된 확신은 결코 우리를 바르게 세울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삶으로 인도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예수 믿는 것은 우리에게 고생이 되고 아픔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일이며 우리의 존재 목적에 충실한 삶입니다. 의미 있는 아픔이며 수고인 까닭에 하늘에서 상이 큰 일입니다. 주변에서 이 찬송을 더 많이 부르고 그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 많이 세워지기를, 아니 하나님께서 그런 계획 가운데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그렇게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초림 김미자 2006.11.30 11:47
    찬송가 364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찬송에 얽힌 많은 일화가 있습니다. 미국의 25대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는 이 찬송을 즐겨 불렀고 임종때에도 이 찬송을 부르며 죽었다고 합니다.1912년 대서양에서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일화도 유명합니다.1635명의 승객들이 죽어가면서 이 찬송을 불렀고 그 배의 악단도 이 찬송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 민정남 2006.12.06 14:27
    나도 이 찬송가사처럼 살라하면 자신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주는 찬송이기도 하지요. 부와 명예,권력이 본질은 아니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면 나는 마음껏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멋진 그리스도인이되고 싶고 또 그것들을 누리고 싶은데요. 고난받으며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자들의 뒤에서 물질로 후원했던 복음자들도 성경에 참 많쟎아요 어떤 그리스도인이냐가 더중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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