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와 양


성서 도구화 하고 성서 텍스트 없는 설교 난무…전문가 설교 공유하는 게 대안


 


2월 24일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열린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연차회의 발제문입니다


 


필자의 설교비평 1권 <속 빈 설교, 꽉 찬 설교> 출간 이후 관심 있는 독자들이나 기자들에게 받은 가장 흔하고 중요한 질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설교 비평의 정당성이다. 설교 비평이 한국교회의 덕을 깨뜨릴 수 있다는 그들의 염려에는 일리가 있다. 설교 비평 작업의 여파로 청중들이 트집 잡는 식으로 설교를 듣게 된다면 선포로서의 계시사건이라는 설교행위의 신학적 토대는 둘째 치고 말씀 공동체의 기본틀이 손상당하고 말 것이다. 예컨대 헬라어를 전공한 일반 신자가 설교를 끝내고 내려온 목사를 향해서 설교에서 인용한 헬라어 문장의 시제에 잘못이 있었다고 따진다면, 그건 공동체 자체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 비평은 교회 공동체가 유지해야 할 카리스마의 원리를 훼손시키지 않으며,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교행위의 정당한 카리스마를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활동에 의존하는 설교를 지향하게 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런 비평적인 태도를 취했으며(렘 14:14), 사도 바울도 그의 여러 서신을 통해서 다른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날카롭게 비판했다는 사실(갈 1:6, 11)에서 설교 비평이 기독교 전통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전통만이 아니라 지난 2천 년 동안 진행된 기독교교리의 형성 과정 자체가 치열한 진리 논쟁의 결과라는 점에서도 역시 설교 비평은 필요한 작업이다. 설교 비평의 정당성 문제는 본질적인 게 아니니까 더이상 언급하지 말고, 오늘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두 번째 질문으로 들어가자.


내가 받은 두 번째 질문은 설교비평의 기준에 대한 것이다. “당신이 다른 목사들의 설교를 비평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 기준의 문제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정당성 문제와 간접적으로 연결된다. 비평의 기준이 바르게 제시될 수 있다면 비평의 정당성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성서 도구주의


설교 비평의 기준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한 사람의 설교자가 고유한 방식으로 말씀을 통해서 경험한 영성을 다시 언어로 전달하고 있는 그 과정에 제3자가 개입할 여지는 그렇게 넓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의 사랑 경험과 그 행위를 제3자가 가타부타 따질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남의 사랑을 자기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극단적인 예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동반 자살하는 이들에게도 우리는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 수 없다. 그들에게만 통용되는 어떤 사랑의 비밀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완전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공공의 자리에서 논의될 경우에는, 즉 자신들의 사랑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선전하게 될 경우에는 분명히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거기에 맞는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런 기준을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의 사랑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설교도 이와 비슷하다. 설교도 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적 차원의 행위이기 때문에, 더구나 그 무엇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당연히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거기에 맞는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 기준도 사랑 경험과 마찬가지로 일단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그 설교가 신자들의 영성을 풍요롭게 만드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신자들의 영성을 심화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설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이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영성은 기독교인들의 인간 이해, 세계관과 역사관, 자기정체성과 연대감 등등, 총체적인 삶에 연관된다. 이런 부분들을 전제한 채 필자가 설교 비평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해야겠다. 그것은 성서 텍스트이다.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가, 그 성서가 말하는 것을 전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너무나 초보적인 기준 같지만, 필자가 보기에 바로 이 초보적인 것에서부터 한국교회 강단이 중심을 잃고 있다.


이런 정도만 암시해도 문제의 근본이 무엇인지 전달되었을 것이다. 성서를 설교해야 할 설교행위에서 설교자들이 성서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하더라도 시늉만 낼뿐이다. 평신도들은 이런 문제를 눈치 채기 힘들다. 그들은 설교자들이 많은 성경구절을 나열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성서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게 아니다. 설교자들이 성경구절을 줄줄이 외운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곧 성서를 말하는 건 아니다. 성서가 설교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지, 아니면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있는지를 판단해야만 한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교회 명망가 설교자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성서 도구주의이다. 실례를 하나 들어야겠다.


<기독교사상> 3월호에 나갈 설교 비평 졸고 ‘궁극적이지 않은 궁극적 관심’은 소망교회 원로인 곽선희 목사의 설교를 대상으로 했다. 필자는 그분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설교에는 성서가 일종의 소품처럼 다루어진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성서 텍스트는 적당한 위치에 자리하면서 설교의 구색을 맞추고 있었지만, 곰곰이 따지도 보면 없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대신 그에게는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말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한국에서 가장 지성적인 교회를, 그것도 5~6만 명의 교인수를 자랑하는 교회를 키웠다. 조금 강하게 말하는 걸 용서하시라. 필자는 이런 설교에 영혼을 팔고 있는 한국의 지성적 기독교인들에게 실망하고, 절망한다. 졸고의 한 대목을 아래에 인용하겠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곽 목사 식의 설교 준비가 얼마나 쉬운지 가르쳐드리겠다. 가장 중요한 작업은 예화모음이다. 감동적인 국내외 이야기를 수집하라. 우화, 동화, 영화, 드라마, 휴먼스토리, 성공담, 과학정보, 독후감, 신기한 동물의 세계, 최신뉴스, 연예이야기 등등, 끝이 없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정보들은 간단히 얻을 수 있다. 중대형 교회 목사라고 한다면 설교 도우미를 쓸 수도 있다. 한 주일에 20편의 괜찮은 이야기를 수집한 다음에 설교 주제에 맞는 것만 추려내라. 곽 목사의 설교 유형에 맞추려면 10편 정도면 충분하다. 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엮은 다음에 적당한 위치에 성경구절을 쑤셔 넣으면, 그것으로 설교 준비 끝이다. 설교의 성패는 이제 입담에 달려 있다.(<기독교사상> 2007년 3월호)


독자 중에는 소망교회에서 곽 목사의 설교를 들었던 분들이 꽤 될 것이다. 필자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거나 침소봉대했다면 나중에라도 지적해주기 바란다. 정식으로 그런 반론을 기독교신문이나 잡지에 올려주셔도 좋다. 한국교회 전체 설교자들의 수준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곽 목사에게 좋은 점들이 비교적 많을지 모르겠다. 그런 것들은 당연히 갖추어야 할 점들이기 때문에 접어두고, 깽판(?)치는 설교자들만이 아니라 세련된 설교자를 대표하는 곽 목사도 기본적으로 성서 도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성적이고 세련된 포즈에 그 실상이 가려진 탓으로 다른 이들의 설교보다 더 위험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짚은 것뿐이다.


성서텍스트의 침묵


성서의 도구화가 왜 문제인지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설교가 뭐 대수냐, 청중들이 재미있게 듣고 은혜 받으면 좋은 설교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설교자들과 또한 평신도 지도자들도 꽤나 될 것이다. 그런 탓인지 우리나라 설교 명망가들은 거의 이런 방식의 설교에 젖어 있다. 성서텍스트는 양념 정도로 다루고 세상살이나 종교 교양을 그럴듯하게 전하는 설교가 청중들에게 어필하니까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설교만이 아니라 목회 전반의 문제는 단지 설교자만의 한계나 잘못이라기보다는 일반 신자들, 특히 평신도 지도자들의 잘못도 크다고 생각한다.


삼천포로 빠지는 한이 있어도 평신도와 한국교회 개혁의 문제를 한마디 해야겠다. 평신도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개혁은 요원하다. 목회자는 일단 목회에 밥줄이 결려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옳을 길을 인식하고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뚫고 나가기가 어렵다. 흔한 말로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는 게 목회행위에도 적용되는 법이다. 평신도들의 형편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그들이 왜 현실 유지(status quo)에 안주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과문한 탓인지 필자는 그들이 교회의 개혁과 한국사회의 진보를 위해서 예언자적 고언을 외쳤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연구와 강의 같은 일에 치이다보니 교회 일에 마음을 둘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말로 이런 현상이 모두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태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연루되어 있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몰이해이며, 둘째는 교회공동체를 통한 종교적 기득권의 유지 강화이며, 셋째는 모든 게 귀찮다는 냉소다. 한국교회 잘 하고 있다, 미래가 있다, 그런데 무얼 개혁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묻지는 마시라.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서, 성서가 설교행위에서 도구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에 나타나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성서 텍스트의 침묵이다. 설교자가 성서텍스트의 존재론적 구원의 지평을 열기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으니 성서가 침묵하는 건 당연하다. 설교자들은 성서 텍스트가 설교행위에서 침묵한다는 이 사태 자체를 인정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이해하지도 못할지 모른다. 이것처럼 결정적인 오해와 착각도 없다. 성서 텍스트는 하나님의 통치를 존재론적으로 담고 있는 거룩한 문서이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의 길을 연다는 것이 신학교에서 배우는 성서론과 계시론의 기초이다. 성서 텍스트에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 통치가 언어 존재론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설교자는 구원의 실체를 모른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이 구원을 이루는 게 아니라 성서가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도 설교 현장만 보면 설교자는 보험상품 설명서를 달달 외워서 판매고를 올리는 외판원처럼 구원을 이미 소유한 듯 ‘세일’에 정신이 없으며, 거꾸로 성서 텍스트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한다.


일상적인 예를 들어 이 상황을 설명해야겠다. 여기 바둑 기보(棋譜)가 있다고 하자. 흑 127번과 백 128번은 하나의 번호로만 자리하고 있지만 그 번호에는 수많은 수가 숨어 있다. 바둑을 둔 기사는 그 번호에 돌을 놓기 전에 수많은 수를 생각했다. 기사의 머릿속에서 오간 그런 수는 기보에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어떤 바둑 해설자가 이런 숨어 있는 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127번의 수로 백을 잡았다는 결과만 지적하면서 이렇게 돌을 잡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설명에만 머문다면 그는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다. 성서 텍스트도 일종의 기보이다. 설교자는 그 안에 은폐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도록 길을 내는 사람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그 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관심도 없고, 다만 청중들을 종교적으로 위로하거나 재미를 주는 것에 만족한다. 성서 텍스트가 철저하게 이용되고,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서 텍스트는 철저하게 침묵을 강요당한다. 독일의 저명한 설교학자 루돌프 보렌은 이런 상황을 이미 40년 전에 지적했다.


이 책을 쓰고 있는 동안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설교에서 성서가 선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서 본문의 침묵과 그 강조점으로부터의 이탈, 성서를 너무 성급하게 접근한 채 그 가운데 언짢은 것들을 덮어버리거나, 문자의 차원에서 집착함으로써 본문과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를 길게 끌어가는 설교행위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셈이다. 성서가 설교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 책을 덮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성서가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이 침묵을 깨려면 성서 자체가 말을 하게 하고, 그 말씀이 청중들에게 들려야 한다.(박근원 역, <설교학 원론>, 1979, 4쪽, 문맥을 조금 고쳐 적었음, 필자 주).


복음의 율법화


성서 텍스트의 침묵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일찌감치 눈치 채고 설교의 패러다임을 바꾼 설교 흐름이 하나 있다. 소위 ‘강해 설교’가 그것이다. 강해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자 필자가 보기에 표면적으로는 이 강해 설교가 주로 ‘제목 설교’에 기울어진 설교보다는 성서 텍스트에 관심을 많이 보이는 것 같지만 성서 텍스트의 침묵 현상은 그들에게도 여전하다.


필자는 지난 3년간의 설교 비평 작업에서 많은 강해 설교자들을 접했다. 전반적으로 건전한 설교자요, 목회자로 이름난 분들이었다. 대구동부교회 김서택 목사,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들도 자칭 강해 설교자이다. 필자가 그들에게서 성서의 놀라운 세계가 열리는 걸 경험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기본적으로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성서 문자주의가 그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복음을 율법(도덕)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율법만이 율법이 아니라 도덕주의도 기본적으로 율법주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복음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가치론적 판단이 윤리와 도덕이 아니라 존재론적 판단인 은총과 믿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윤리적·도덕적 행동을 자신들의 잣대로 쉽게 재단할 수 있다. 로마서 1:26의 말씀을 근거로 동성애자들을 단죄하는 설교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설교는 마녀 재판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이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강해 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성서의 놀라운 은총의 세계는 침묵하기 마련이다.


복음을 일종의 죄책감 비슷한 심리적 차원으로 끌어내린 대표적인 강해 설교자 한 분을 소개해야겠다. <게으름>이라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다.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를 비롯해서 이와 유사한 수많은 책을 집필한 김 목사의 능력은 바로 청중의 감수성을 닦달함으로써 자신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텍스트의 침묵을 모면한다는 것이다. 이런 설교자는 하나님의 광휘에 휩싸인 사람이 가능한대로 자신을 축소시킨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흡사 “새벽종이 울렸네!” 수준에서 청중들의 불안한 정서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설교하고 있을 뿐이다. 청중들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닦달하는 걸 설교라고 착각한다. 본인은 이런 신앙적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불꽃’처럼 살아야 할 우리의 바른 태도라고 주장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 목사는 자기가 주장하는 ‘불꽃’이 무엇인지, 풍요로운 삶이 무엇인지 그 실체로 들어가는 일은 없고 단지 그런 것에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만 매우 선정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는 성서 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노력보다는 죄와 용서라는, 매튜 폭스의 표현으로 타락·속량 영성인 청교도적 감수성에 기울어져 있다. 이런 영성은 심리적으로 나르시시즘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성서 텍스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한다는 말인가? 오늘 우리는 이 문제까지 깊숙이 다룰 형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마디는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설교자는 성서 텍스트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하나는 주석이며, 다른 하나는 해석이다. 주석은 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해석은 그것의 전승사적 지평으로 들어가는 작업이다. 주석은 순전하게 역사 비평이라고 한다면, 해석은 해석학적 접근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석은 성서신학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고, 해석은 조직신학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전자는 성서 텍스트에 놓인 성서시대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들어가는 작업이라면, 후자는 오늘을 사는 독자들과의 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진리와 방법>을 쓴 가다머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런 작업을 통해서 성서 텍스트의 지평과 오늘 독자의 지평이 변증법적인 융해를 일으킴으로써 새롭고 창조적인 지평이 열린다’. 그 해석의 길은 그 저서의 제목이 가리키듯이 방법론이 아니라 진리의 문제이다. 오늘 설교자는 이런 점에서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보라. 그렇게 많은 설교에서 창조적 설교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이 비극적인 현실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해석학적 작업에 소홀할 뿐만 아니라 관심이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서 텍스트는 침묵하고 있으며, 따라서 설교도 역시 장광설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장광설은 곧 잔소리 아니겠는가. 잔소리로 떨어진 설교에 청중들이 환호하고 있는 이 현상은 집단적인 정신질환의 한 조짐이 아닐는지.


성서의 침묵과 셀 목회


성서 텍스트가 침묵하게 될 경우 설교자는 어쩔 수 없이 청중과 소통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게 마련이다. 그 길은 물론 정도가 아니라 외도이다. 정곡이 아니라 변죽이다. 매우 선정적이지만 결국 영성을 파괴할 개연성이 높다. 교회의 외도가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교회당 건축에 대한 집착은 그 한 가지이다. 주기적으로 부동산 과열로 인해서 국가 경제가 휘청거릴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마음이 거칠어지는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는 붕어빵이다. 이 문제는 매우 광범위하게 드러난 증상이니까 더이상 끌고 가지 말자. 겉으로는 매우 복음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서 텍스트의 침묵으로 인해 벌어진 영성의 고갈을 숨겨보려는 또하나의 길은 교회의 과도한 조직이다. 장로·안수집사·서리집사·권사·권찰 등등, 기존의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 일정하게 세를 얻고 있는 ‘목장교회’라는 새로운 목회패러다임도 역시 교회당 건축에 ‘올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성의 미숙으로 인한 외도이다. ‘다단계 판매조직’에 버금가거나 능가할 정도의 조직 관리가 종말론적 구원공동체인 교회에 왜 필요한지 필자는 이해할 수 없다.


사실 한국교회가 성서 텍스트의 신학적 깊이와 영성은 외면한 채 조직 관리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게 된 역사는 길다. 여기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는데, 우선 순모임이나 제자화, 셀목회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론들이다. 필자가 신학대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초 한국대학생선교회(CCC)는 ‘사영리’라는 전도용 소책자를 중심으로 자기들 나름의 순모임을 확장시켜나갔다.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사영리는 비록 기독교의 복음을 간추린 것이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탈(脫)역사적인 방향으로 흘러감으로써 복음의 총체성을 훼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 이후로 한국 젊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훨씬 개인주의화했으며, 대신 조직이 득세하게 되었다.


약간 다른 방향이지만 뜨레스디아스·알파코스 같은 것들도 역시 이런 조직의 한 방편들이다. 도대체 교회가 ‘뭐 길래’ 신자를 공주처럼 대접하는 이벤트를 통해서 자기 판타지 속에 빠지게 하고(뜨레스디아스), 기도하면 은으로 해 넣은 이빨이 금니로 바뀐다는 것인지(알파코스)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런 이벤트는 삶이 무료한 노인들에게 값비싼 물건을 팔기 위해서 관광을 시키거나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장사꾼들의 행위와 다른 게 하나도 없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신들이 전달해야 할 그 복음의 내용이 부실한 반면에 포장만 호화롭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이런 이벤트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그만큼 한국교회의 현실이 조급하다는 데에 있거나, 또는 목회자의 영성이 장사꾼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데에 있다.


‘당신은 한국교회의 종교 현상을 너무 폄하하는 것 같다’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가 없는 법인데, 가능한 한국교회를 개량해나가야지 그렇게 비판만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말이다. 옳은 지적이다. 한국교회가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나, 또는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세리라고 하더라도 성령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신자들의 영성을 끌어가실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한국교회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한국교회가 신학적인 자기 성찰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설교행위에서 성서 텍스트가 침묵하고 있다는 이 엄정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설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그 어떤 외침도 구두선(口頭禪)이 되고 말지 않겠는가.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


마지막으로, 설교문제와 연관해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교과서식으로 말한다면 일단 신학생들의 신학교육을 철저하게 시켜야 하며, 아울러 현재 목회자들의 재교육도 시급한 문제이다. 그러나 개인 설교자들을 교육시키는 이런 방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현재의 목회구조가 설교자들로 하여금 설교에 천착할 수 있게 만들지 못하며, 더 근본적으로는 모든 설교자들이 이런 신학적 영성의 경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젊은 시절에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몇 명이나 시인이 되겠는가? 일종의 신탁(神託) 사건인 창조적인 설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지금 한국교회는 일반 설교자들에게 힘에 부치는 요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곧 조수미 씨 같은 세계 정상급의 성악가에게나 가능한 노래를, 예컨대 모차르트의 <요술피리>에 나오는 아리아 ‘밤의 여왕’을 아마추어 성악가에게 부르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하나? 복잡하게 생각하면 복잡하겠지만 쉽게 생각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미 교회의 전통이 그 길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전통은 그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이미 미래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쪽을 향해서 영적인 촉수를 늘 기울어야 한다. 여기서 전통은 교회력과 예전을 의미한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와 설교 전문을 일정한 수준에 올라선 설교 전문가들이 작성하고, 그것을 개별 설교자들이 섬기는 교회의 형편에 맞도록 활용하는 방식이 최선이다. 이럴 때 개별 설교자는 설교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되고, 청중들은 품격 높은 설교를 들을 수 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방식에 염려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별 설교자들의 영성이 훼손된다고 말이다. 그건 그야말로 쓸데없는 노파심이다. 목사의 영성은 설교 준비에만 달려 있는 건 아니다. 개인의 성서 읽기와 묵상, 섬김, 예배 인도 등등, 영성 심화의 길들은 많다. 전문가에 의해서 준비된 설교 전문으로 설교를 하게 되면 개별 설교자들의 영성도 그만큼 심화되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라. 시인도 아닌 사람이 억지로 쥐어짜낸 시를 청중들에게 떠들어대는 것과 진짜 시인의 시를 청중들에게 읽어주는 것 중에서 우리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하겠는가. 필자의 생각에 개인 설교자들을 설교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말씀은 바로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필요하지 않을는지.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미 이런 패턴으로 가고 있다. 그들은 사제의 개인 역량보다는 가톨릭교회 전체의 역량을 키우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예컨대 지금도 여전한지는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주보도 교구별로 제작했다. 서울교구는 개별 성당에 필요한 지면만 공백으로 한 서울교구 주보를 만들어서 개별 성당에 돌린다. 공동의 주보가 주는 장점 중의 하나는 교회 일치를 가르친다는 것이며, 또다른 하나는 내용의 고품격화이다. 박완서 선생의 신앙묵상집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는 그가 서울교구 주보에 실었던 성구묵상을 묶은 것인데, 필자는 그의 글을 읽고 그 어떤 목사의 설교보다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만약 개신교회도 노회별로 공동의 주보를 만들 수 있다면 이런 비중 있는 글쟁이의 글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일치, 교회력에 의한 미사와 강론 등등, 이런 것들이 개신교회와 달리 로마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장점들이다. 이 장점들이 결국 한국에서 가톨릭교회의 외형적인 발전까지 불러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 잘 알려진대로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로마가톨릭교회는 지난 10년간 70~80%가 증가한 반면에 개신교회는 아주 적은 수치이지만 마이너스 성장에 머물렀다. 어떤 개신교 목사들은 이런 통계를 믿을 수 없다고 하고, 심지어 노 정권에 의한 조작설까지 나돌았다. 그게 이상한 일이다. 로마가톨릭교회에 비해서 개신교회에는 스타 설교자들과 대형교회당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전체의 틀에서 볼 때 로마가톨릭교회가 훨씬 역동적이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더구나 이것이 단순히 외형적인 변화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적인 실체에 의한 결과라고 한다면 개신교회는 존재론적인 위기에 빠진 셈이다. 현재와 같은 추세라고 한다면 10년 후에는 신자의 절대적인 숫자에서도 로마가톨릭교회가 개신교회를 능가할 가능성이 높다.


자학적으로 표현하는 걸 용서하시라. 이런 결과는 자업자득이다.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우리 개신교회가 지난 20~30년 동안 보여준 행태가 그대로 열매를 맺은 것뿐이다. 이 행태는 외적으로 교회 성장지상주의이며, 내적으로 루돌프 오토가 설명한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의 상실이다. 성장론이 거룩성을 압도했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개신교회 지도자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게인 1907’ 같은 이벤트로 잠시 위기를 모면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어느 철학자가 한국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돌진 근대주의’에나 어울리는 무조건적인 성장논리가 아직까지도 한국개신교회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게 명백하지 않는가. 그들은 그렇게 간다고 하더라도 생각이 있는 신자들은 이제부터라도 신앙의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한다. 설교자들도 무늬만이 아니라 실질의 깊이에서 성서 텍스트의 기초로 돌아가야 한다. 그 기초만이 사람도 살리고 교회도 살리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 지성인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타는 목마름으로!


 

  • 초림 김미자 2007.03.06 15:55
    장문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광부가 금맥을 찾아 깊이 들어가듯 말씀의 의미와 보화를 캐내고 곱씹으며 묵상할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 움직이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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